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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예배보다 '가정 예배' 택한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개신교는 '만인 제사장', 단독자로 예배할 수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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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 타는 사람들의 특징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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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교회의 복음 자체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구약 한 줄도 없이 전해지는 복음. 예수 믿고 정점에 올랐다는 간증... "저는 한국교회의 복음 자체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연구원_느헤미야 #김근주교수 #새롭게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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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한 줄도 없이 전해지는 복음.
예수 믿고 정점에 올랐다는 간증...

"저는 한국교회의 복음 자체가
붕괴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근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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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눈으로 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사람 모인 곳(회당)으로 가지 말고, 당신 자신을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십시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무너뜨리셨지만 , 그 성전보다 훨씬 더 존귀한 성전들을 많이 세우셨습니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입니다. 당신이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아름답게 하고, 모든 악한 생각을 물리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리스도의 귀한 몸, 성령의 성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당신이 성전으로 세워진 것처럼 이제 나가서 다른 사람들을 성전으로 세우십시오. 성전이 된 사람이라면 가난한 자를 볼 때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입니다. .... 당신이 거룩한 성전이 되어 얻게 될 유익은 일만 달란트보다 더욱 값진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톰, Eight Homilies against the Jews VI, 7.7, trans. C. Mervyn Maxwel>

<“이유를 분명히 하고, 답변할 준비를 하라.”>

내가 후배들에게 입이 닳도록 하는 말이다. 특별히 예배에 관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다. 예배의식문을 사용하는 전례교회든 그렇지 않은 비전례 교회든 간에 이 권면은 모두에게 유익하다. (참고로, 난 고교회 저교회란 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가끔 보면, 이유도 모른 채 그저 ‘옛 것은 좋은 것이여~’하며 선배들 뒤꽁무니만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전례교회 경우엔, 그저 오래 된 것, 또는 복잡하고, 폼 좀 나는 복식이나 예배의식을 이유도 모르고 맹신하는 복고주의가 판을 치고, 비전례교회 경우엔 반대로, 의식이나 형식은 모두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버려, 낯설거나 복잡하게 보이는 것은 과감하게 내친다.

그런데 그런 행동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내가 보기에 의미를 모른 채 선배들이 해 온 그대로, 교단이 정해 준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개신교 목사로서 ‘직무유기’에 속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유산이란 선배 뒤꽁무니를 그대로 따라가거나 기존 교리를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것과 정반대 위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개신교 정신은 ‘기존의 모든 권위를 의심하고 질문하는 바른 비판 의식’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개신교를 '개긴다'는 뜻의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하지 않나?

개신교 신학의 가장 독특한 가르침은 '모든 신자의 만인사제직’과 ‘소명(직업)론’이라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학교 교과서 틀에 박힌 ‘교리’가 아니다. 여기엔 종교개혁 신학이 담고 있는 특수한 원리가 지배한다. 그 원리란, 방금 언급한 ‘기존 권위에 대해 질문하는 비판 의식’이다. 이 비판 정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비판’이란 부정적인 뜻이 아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별하여 ‘정당한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어제 아침 이야기 하나 해보자. 타교단에서 목회를 하는 오랜 친구가 새벽 예배를 마치고 급하게 찾아왔다. 찾아온 이유는 성찬의식을 배우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번 성탄절에 집례를 해야 하는데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 교단에서는 일 년에 한 두 번 하는 거라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문득 이런 말을 한다. “성찬을 일 년에 한 두 번 하기는 하는데, 교인들도 목사도 이것을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해요. 그저 일종의 세레머니로 생각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냥 시간 낭비로 생각하기도 해요.”

진짜 그럴까?

친구와 아침 식사하고 성찬에 관한 순서와 신학적 의미, 목회자의 제스츄어에 관한 세세한 내용들을 설명하고 났더니 이젠 이런 말로 변한다. “아, 그러고 보니 츠빙글리도 성찬을 일 년에 두 번 하라고 했는데, 하기 전에 꼭 성찬에 관한 교육(사경회)을 집중적으로 한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네요!”

각 교단마다 예배 형식이나 의식 순서는 모두 다를 수 있다. 그리고 횟수도 다를 수 있다. 성찬례만 하더라도 루터교회는 매주일 예배 때 마다 하지만, 츠빙글리와 칼뱅, 웨슬리 또는 아나뱁티스트 전통 교회는 일 년에 한 두 번, 또는 아예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성찬의 빈도수를 기준으로 어느 교단이 신학적으로 우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 말로 그 무식함으로 하늘도 찌르고 남을 자다. 각 교파 신학은 성찬을 매일 하든 아예 하지 않든 모두 나름대로 특수하고 정당한 역사적 배경과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매주일 성찬을 나누는 루터교회의 성찬이 타성에 젖어버릴 위험을 보고선, 츠빙글리와 칼뱅파에선 그렇게 성찬 횟수를 제한했던 것이지, 성찬 자체가 별 가치 없기 때문에 제한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혹시 매주일 성찬을 나누는 루터교회에서는 전통이란 이름으로 감동은 사라지고 기계적 타성만 남고, 일 년에 한 두번 하는 장로교회는 성찬식이 너무 어색해서 집례하는 목사조차 이런 걸 왜 하는지 머릿 속에 물음표만 가득한 건 아닌가?

성찬을 하건 안 건, '경배와 찬양'을 하건 안 건 간에, 교회의 각종 절기와 행사, 교육을 왜 해야하는지 목회자는 그 ‘이유를 분명히 하고 답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거꾸로 교인들은 목사에게 이런 것을 '왜 해야 하는지?' 질문하는 용기와 개김 정신이 필요하다. 그게 선하게 잘 개기는 프로테스탄트의 첫걸음이다. 물론 목사는 이 질문과 비판에 답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이 목사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고, 교회 공동체를 위한 일이다.

그런 일 하라고 신학교 다녔고, 그런 일 하라고 교회에서 목사로 세워준 것이니 이 일을 게을리하거나 우습게 여기면 곤란하다.

종교란 본디 의미의 집합체다. 의미가 사라진 종교란 존재가치를 상실하게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교회와 신앙의 자리엔 보물찾기처럼 기독교적 가치가 역사와 전통 속에 숨겨있다. 하나하나 찾을때마다 재미가 쏠쏠할 뿐만아니라 영성도 더 넓고 깊어질 것이다.

이제 성탄절이 되면 여기저기서 성찬식을 하게 될 텐데, 한 번 질문해보시길 권하다. 왜, 이것을 해야 하는지, 저기에 왜 저런 순서가 꼭 필요한 것인지! 목사에게도, 신자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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