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별들이 마침내 그 빛을 잃어버릴 때. [David Woo-jo Jeong]
『별들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박영돈 저, 복있는 사람.
 
 
 
1. 작은 별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 속에서
 
오늘날 이 땅의 목회자에게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아마도 '공감능력'이 아닐까한다. 타인의 기쁜 소식에 함께 웃고, 이웃들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릴 줄 아는 능력,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의 지극히 당연한 요건이지만, 오히려 인간성을 상실한 괴물들로 가득 차버린 작금의 한국 사회에는 그래서 더욱 필요한 덕목이지 않을까.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를 그리스도의 빛 앞에 서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자신의 비참을 깨닫게 하고, 성령의 영감에 비추인 위로의 말씀으로 그 상한 심령을 소생시켜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만드는 사역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가야 할 목회자라면, 누구보다 인간의 실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케 하는 탁월한 지성, 그리고 가슴으로 사람을 끌어안는 뜨거운 마음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박영돈 교수(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는 좋은 목회자다. 그는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전문신학자지만, 그의 저서들과 SNS에 남긴 글들에는 교의학자 특유의 냉철하고 예리한 판단과 더불어 현장 목회자로서의 따스한 위로, 나아가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공감하고자 하는 노력이 듬뿍 묻어난다. 신학이 교단 정치의 시녀로 수시로 전락하는 오늘날 낮고 겸손한 마음을 지키며 동시에 의연한 선지자적 음성을 발하는 신학자를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본서의 저자가 바로 그러한 미덕을 갖춘 이인 것이다.
 
이 책, 『별들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는 저자의 그러한 공감의식에 기대어 있다. 서문에서부터 그는 자신을 포함한 기성세대의 과오에 대해 정직하게 돌아보고, 이 세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주어진 시대의 아픔에 큰 책임감을 느끼며 미안해한다. 또한 본서는 네 편의 설교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느 한 편 할 것 없이 일관적으로, 청중들을 향한 그의 방향성과 관심사가 바로 여기에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보고 배울 만한 어른이 드물다는 암울한 현실, 자신 또한 부족하고 부덕한 어른들 중의 한 명임을 자책하면서(8), 부디 후배들은 기성세대의 그릇된 길을 따라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애통함과 미안함으로부터 본서는 출발한다. 깊고 어두운 밤 속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 지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있는 아픈 청년들에게, 갈 바를 알려줄 만한 별빛 한 조각조차 남겨주지 못했다는 회한을 통해 말이다.
 
 
 
2. 아프지만 따스한...
 
(1)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본서에 수록된 첫 번째 설교는 전도서 11:9-12:1 본문을 통한 메시지다. 여기서 전도자는 젊은 날 주어진 시간을 헛된 금욕주의에 낭비하지 말고 자신이 기뻐하는 바를 좇아 살 것을 종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선택과 행동이 하나님 앞에 심판의 준거가 될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한다. 자칫하면 양비론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러한 모순적 서술을, 우리가 마땅히 쾌락을 쫓아가되 세상의 헛된 것이 아닌, 오히려 모든 쾌락의 '원천'이신 하나님 그 분을 사랑하고 즐거워함으로 함께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저자는 갈무리한다.
 
또한 저자는 한 가수의 자전적 노랫말을 인용하며, 생의 무게를 짊어진 모든 인간이 결국은 삶의 허무에 대해 실존적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22-24). 세상의 모든 쾌락을 탐하고 맛보았지만 끝내 하나님 부재의 허무함 앞에 직면했던 전도자처럼, "놀만큼 놀았음에도" 남은 것이라곤 자아의 허기짐 외엔 없음을 고백하는 가수의 모습이 구원자 없는 인생의 비참함을 잘 보여줌을 역설하며, 청년들에게 주어진 젊음을 죄가 주는 달콤한 열락에 탕진하지 말고 그 대신 하나님을 갈망하여 그의 나라를 누리는 데 진력할 것을 권면한다. 그것이 전도서의 기자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지혜'이자 참된 기쁨을 소유하는 삶이라는 점을, 또한 기성세대가 물려주지 못한 기독교적 삶임을 강조한다.
 
 
(2) 어느 젊은이의 슬픔
 
두 번째 설교는 주님을 찾아온 한 젊은 부자 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본문(마 19:16-26)으로 전하고 있다. 저자 혹은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네 편의 설교가 각기 순서에 맞추어 구원을 향한 여정의 구도로 설정되었다고 느꼈다. 앞의 설교가 하나님 없는 인생과 쾌락의 허무함을 역설하고, 젊은 날 하나님께로 돌이킬 것을 말씀하고 있다면 두 번째 설교를 통하여서는 하나님께로 돌이킨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젊은이들 가운데 삶과 그 이후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질문을 던지는 이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어쩌면 가벼운 사유조차 하지 못하는 각박하고 치열한 세상이 우릴 그렇게 몰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의 의미를 추적해가는 일이 저평가되어버린 오늘날에도, 여전히 실존의 유의미함이라는 빛을 찾기 위한 항해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도, 이러한 항해자가 존재했던 모양이다.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젊은' 부자 청년 말이다. 나아가 "부자 청년처럼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탐구하는 이들이라면 이 말씀이 던지는 질문과 도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47)." 그가 예수님께 던진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율법이 결코 구원에 불필요한 요소가 아님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율법의 요구를 모두 준수했노라는 청년의 자신감 넘치는 대답은 이어지는 주님의 답변을 단숨에 복음의 핵심으로 이끌어 간다.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기에 복음의 본질이 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삶의 모든 것이 집약되어 있다. 나를 비워 너를 배불리는 것, 계명의 문자적 준수가 아니라 그 정신을 온전히 체화시켜 하나님의 법 그 자체인 주님을 따라가는 것. 그러나 부자 청년은 주님의 내민 손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소중했던 것이 바로 자신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그 청년의 우상이 된 재물을 내려놓기 위해서는 극적인 결단과 전적인 헌신이 요구되었다. 재물을 끌어안고서도 이런 저런 계명들을 지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는 있으나, 그 재물을 위해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의를 이루어 쌓아 올린 자아의 왕국을 무너뜨리며 임하는 하나님 나라를 청년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62)."
 
부자 청년의 비극은 어쩌면 오늘날에도 무수히 재연되고 있을 것이다. 도덕적 강박과 종교적 열광에 취해 스스로 구원의 조건에 충족했노라 착각하는, 그러나 실상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우상-그것이 재물이든 외모든 그 어떤 것이든–은 포기하지 못한 많은 청년들이 지금도 근심하며 십자가 앞에서 발길을 되돌리고 있으리라.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던 옛 자아가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회개(52)"이다. 그러므로 '회개'하는 은혜가 임하지 못한 모든 인생은 세상의 모든 쾌락을 누렸다 해도 결국 비참한 것이다. 더욱 거대한 비극은, 당장 회개가 필요한 사람들을 향해 "당신은 이미 구원받았노라"고 선포해버린, 거짓 복음의 좌판이자 가면무도회장으로 전락한 오늘날의 교회들에 있다.
 
 
(3) 우리의 얼굴을 찾을 때
 
세 번째 설교는 이러한 비극의 장이 되어버린 오늘날 교회들의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며 시작한다. 고린도후서 3:18-4:6에 걸쳐 사도 바울은 참된 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주님의 영광에 대해,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마주하는 것처럼 보게 될 것이라 말씀한다. 필자 또한 종래에는 그렇게 되리라 소망을 가지며 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온 세상이 가면무도회장이며, 우리 인생 자체가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삶이 아닐까. 문제는 이러한 가면이 "상대의 얼굴뿐 아니라, 자기 자신의 얼굴도, 동시에 하나님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한다(78)."는 데 있다.
 
두 번째 설교 말미에 언급한 "회개란 결국 '가면을 벗는 것'이다(79)."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이요,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성령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진정한 쾌락으로서 누리는 복이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는 소식이며, 성령이 그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셔서 추악한 가면들을 다 벗기심으로 우리의 실재가 된다. 제국의 거짓 복음과 허황된 영광이라는 가면, 겉으로는 형형색색의 화려함으로 치장되었을지 모르나 벗겨보면 그 안쪽은 온갖 오물과 징그러운 구더기들로 가득한, 그런 우리의 본성적 죄악을 성령께서 고발하고 제거하시는 것이다. 그리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나의 진짜 얼굴을 회복시키신다. 
 
저자는 우리의 교회 생활이, 종교적 열정에 기인한 헌신적 태도가 오히려 가면을 더 두텁게 하고 말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경우 신앙의 연수가 오래될수록, 구원에 대한 자기 확신이 뚜렷할수록 점점 더 가면을 벗기 어려워지고, 심지어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활동하는 것이 정직하게 자신의 추한 얼굴을 드러내 회개하는 것을 교묘하게 회피하는 방편이 될 수 있는 것(108)"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진 교회는 신자의 가면을 벗겨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가면을 더욱 두텁게 하고 만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서만, 온전히 주님의 얼굴빛을 볼 수 있다. 골고다 언덕에서 당신의 아들에게 오롯이 부어진 하나님의 진노의 얼굴이, 마침내 십자가의 사랑에 의해 한없이 자비로운 긍휼의 얼굴로 변화하여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의 민낯을 초청하고 있다. 깨어지고 상한, 가난한 심령의 민낯으로 십자가 앞에 서는 자들에게 진정한 하늘의 복이 임하게 된다. 단단한 바위처럼 견고하던 우리의 가면 속 자아가 마침내 바스라지고 그 갈라진 틈 사이로 하나님의 생수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이다.
 
 
(4)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삶
 
본서의 마지막 장, 네 번째 설교는 바로 이 '생수의 강'에 대한 말씀을 다룬다. 결국 전도자의 허무에 가득 찬 외침으로부터 출발한 구원의 여정, '참된 생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의 종착역은 하나님의 심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수, 더 나아가 그 생수의 강이 넘치는 성전인 것이다. 이러한 생수의 강 이미지는 신구약 전체를 관통하며 도도히 흐르고 있다. 에덴을 적셨던 강, 광야의 바위에서 터져 나왔던 샘, 에스겔의 환상 속에 계시된 성전 문지방에서 나온 생수, 그리고 새 예루살렘을 흐르는 생명수의 강. 이 모든 상징과 예표를 담지한 단 하나의 존재이자 생수의 근원,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끝나지 않는 존재적 갈증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유일한 소망은 참 성전이신 주님이며,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전도자의 공허한 고백을 극복할 수 있는 길 역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전도서의 기자는 타는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여러 가지 (‘쾌락’이라는) 음료를 구해 마셔봤지만, 결국 땅의 것은 그를 더욱 깊은 허무 속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다. 율법의 요구를 나름 충족시켜가며 자신의 우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자 했던 부자 청년의 실패도, 결국 시원한 생수가 아니라 짜릿한 탄산수로 영원한 목마름을 어떻게 해보려고 했던 어리석음이 부른 패착이 아니었던가. 끝끝내 탄산이 주는 찰나의 쾌락을 포기하지 못한 청년의 집착, 가면을 벗으면 내 추악한 민낯이 드러나고 말 것이라는 마지막 한 꺼풀의 두려움이 그를 복음의 좁은 문 앞에서 멈추게 했고, 결국은 발걸음을 돌리게 하고 만 것이다.
 
영원한 존재적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들이키고, 그 물이 우리 안에서 다시 솟아 나오게(127)"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이란 예수께서 약속하시는 생명수를 들이키는 것이요, 구원이란 그 생수가 다시 우리에게서 발출되어 온 세상을 적실 때까지 이 놀라운 선순환을 멈추지 않는 일이다. "예수님이 일차적인 생수의 근원이라면 신자는 이차적으로 생수의 근원이며, 예수님이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성전의 원형이라면, 신자도 그것을 재현하는 성전인 것(128)"이다. 오직 생수의 선순환만이 우리를 끝없는 허기짐과 타는 갈증에서 해방시키며, 나아가 온 세상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수 그 자체인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케 역사하셔서, 먼저는 우리를 물댄 동산으로 변화시키고, 그 물댄 동산들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생수를 흘려보내 모든 피조세계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성서를 통해 계시하시는 주님의 심원한 구원의 계획인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몸을 세상의 썩어질 헛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젊은 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영성’이란 가면 뒤에 숨어 종교의 허울을 뒤집어 쓴 채 더러운 쾌락을 탐닉하는 대신, 나의 몸을 온전히 주님의 성전으로 가꾸어가는 것이다. 성전이 되기 위해 먼저 참 성전이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앞에 부복할 때 우리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이의 충만함", 즉 진정한 교회가 된다. 그것이 전도자의 공허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요, 별들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새벽의 도래를 준비하는, 이 시대의 아픈 청년들이 나아가야 할 길이 아닐까 되 물으며 저자는 설교를 마친다.
 
 
 
3. 별들이 마침내 그 빛을 잃어버릴 때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이라는 문구는 본디 영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말이다. 개인의 영성을 찾고 함양해가는 고단한 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하나님 부재의 상황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인간 존재의 심원한 절망감을 서정적으로 표현한 문구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청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은 차라리 단순한 영적 차원을 벗어나 총체적인, 심지어 사회 전반에 걸쳐 공험되어지는 처참한 집단의식에 관한 서술이다. 아직도 수십 년 전에나 가능했던 상승곡선의 낙관에 취해있는 기성세대의 조롱 섞인 비난과, 그들이 강고히 이룩해 놓은 무한 경쟁 체제 속에서 서로 짓밟고 버둥거리며 구인구직란을 헤매고 있는 청년들의 비참한 현실은, 분명 이 사회가 집단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영혼의 깊고 어두운 밤'인 것이다.
 
별들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때가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저자의 충고는 어쩌면 오늘날 청년들에게 그리 와 닿지 않는 권면일지도 모른다. 이미 청년들은 지칠 대로 지치고, 절망할 만큼 절망했기에, 작은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기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유일한 소망이신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구호는 일견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 땅의 기성세대들은 밤하늘이 별빛으로 환하던 시절을 살았다. 식민지배와 내전의 아픔이 가져다 준 깊은 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의 부모와 그들의 부모 세대는 부지런히 별들을 만들어 쏘아 올렸다. 교계에도 많은 '별'들이 등장했고, 그들이 이끈 기독교는 잠시나마 불야성의 위용을 자랑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배들은 아무리 찬란한 빛을 발하는 별이라 해도 결국은 그 빛을 잃어버릴 시간이 찾아온다는 간단한 진리를 잊었기에, 우리에게 칠흑과 같은 어두운 밤을 물려주고 말았다. 그들이 쟁취한 승리의 영광 이면에 이미 예고되어 있던 파탄과 절망의 짐을, 작금의 청년들이 고스란히 끌어안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나는 본서를 통해 생생히 울려지는 저자의 피맺힌 외침이, 이러한 맥락을 결코 간과하지 않은 것이라 본다. 달콤함에 취해 거품이 빠져버릴 이후를 대비하지 않은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다음 세대의 얼마 남지 않은 골든타임마저 놓치지 말 것을 애타게 권하는 저자의 심정이 네 편의 설교에서 묻어 나옴을 느낀다. 이미 칠흑 같은 밤은 찾아왔고, 얼마 남지 않은 별빛마저 바스라질 운명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허나 어쩌면, 오늘날 그리스도인 청년들이 마주하고 있는 '때'는 가장 춥고 어두운 새벽, 동이 트기 전 마지막으로 흑암이 몸부림치는 시간일지도 모른다. 
 
별들이 더욱 어두워져 마침내 그 빛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태양과도 같은 밝고 찬란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당신의 얼굴빛으로 비춰주실 영광의 때라면, 그래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들로 하여금 주님의 참 교회를 다시 만들어가게 해주실 때라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이킬 마지막 기회이지 않을까. 아편과도 같은 일시적인 열락의 꽃을 피우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갈 마지막 기회. 그렇다면 지근거리조차 보이지 않는 이 어둠을 넘어, 비로소 떠오를 태양을 기다리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우리는 새로운 새벽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별들이 마침내 그 빛을 모두 잃어버릴 때, 찬란한 태양의 온기 넉넉한 미소가 우릴 반길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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